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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모없는 것들이 우리를 구할 거야

by 푸른보리 2024. 1. 11.

작고 찬란한 현미경 속 나의 우주

 

아무런 계획 없이 떠난 여행,
세상 가장 할 일 없는 사람처럼 천천히 걷다 보니, 서서히 눈길 닿는 곳마다 세심하게 관찰을 시작하게 되었다. 더 천천히, 더 샅샅히 둘러보니 처음 만난 신세계를 여행하는 듯한 새로움이 느껴졌다. 일상의 시공간이 낯선 세계가 되어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경제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진화를 연구한다는 건 참 쉽지 않은 일이다. 현미경 너머로 우아하게 꿈틀거리는 나의 예쁜꼬마선충들은 별 인기가 없고, 진화 연구는 한국 사회에서는 더더욱 인기가 없다. 질병을 연구하는 것도 아니고, 연구결과가 나온들 바로 돈을 벌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요즘 세상에 세금으로 이런 벌레나 연구한다고 비아냥을 듣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_ 그러나 세금으로 이런 일 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는가 

그런 즉각적이고도 눈에 띄는 일들은 경제논리에 맡겨두어도 물살이 끊기지 않겠지만 이런 분야는 다르다. 

 

_ 주목받지 못하는 것은 저마다의 쓸모를 아직은 증명하지 못한 것일 뿐 

 

어마어마한 연구를 아무것도 없는 맨바닥에서 시작할 수 있었을까? 인력은 얼마나 투입되야 하는지, 몇 년이나 시간을 써야 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수학 문제를 풀 때도 예제와 연습문제를 풀어본 다음에 실전 문제로 들어가듯 유전체 지도를 만드는 데도 연습 문제가 필요했다. 

 

연구란, 인류가 알고 있는 지식의 테두리를 송곳으로 조금씩 찔러 넓히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다. '뾰족한 끝' 이라는 뜻을 지닌 첨단이라는 한자어처럼, 인류의 지식 그 끝을 조금씩 넓혀가기 위해서는 연습과 훈련이 필요하다. 내가 지금 풀고 있는 문제들은 언젠가 기술만 발전한다면 풀 수 있게 될 진화 연구의 연습 문제들인 셈이다. 어쩌면 그 길에서 인간에 대해 더 깊이있게 이해하게 되고, 인류의 삶에 훨씬 더 큰 기여를 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한 생명을 이해한다는 건 먹이고 키울줄 아는것에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것이 정말 가능할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그렇지만 세상을 뒤흔든 과학의 발견은 때로는 우연히 찾아오기도 한다. 실험 도중 실수로 방치한 푸른곰팡이에서 발견한 페니실린, 내복용 살균제를 개발하다가 탄생한 해열진통제 아스피린, 그리고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금을 만드러내려다가 정작 금은 못 만들고 수많은 새로운 물질을 발견해 근대 화학의 발달을 이끈 연금술사들의 사례도 있다. 크리스퍼 역시 감기에 걸리지 않는 유산균을 연구하다가 우연히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례들은 모두 우연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중요한 것은 이같은 행운을발견하기 전까지 온갖 다양한 생물을 연구한 역사가 앞섰다는 것이다. 인류가 우연히 찾아낸 수많은 자연물질들처럼, 다양한 생물들을 연구하다 보면 정말 뜬금없는 곳에서 해결책이 나올지도 모를 일이다. 

 

연구자들 사이서 농담처럼 주고받는 말이 있다. "더 좋은 연구란, 이미 끝나서 논문으로 발표된 연구"라고 말이다. 그러니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서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연구를 조금이라도 빨리 완성하는 것이 좋은 연구 아닐까. 

 

뭔가를 꾸준히 배우고 익히면 나도 모르는 새 그 과정에서 배우는 온갖것들이 일상에 스며든다. 

 

생물학을 잘하기 위해서는 생물학을 더욱 깊이 있게 공부하는 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 전혀 다른 분야의 관점에서 생물학을 바라볼 때, 우리는 이 시대에만 답할 수 있는 새로운 문제를 찾게 될지도 모른다. 

지금은 쓸모없다고 손가락질 받는 것들이 어쩌면 지식의 한계를 부술 결정적인 연구가 될 수도 있다. 

 

- 최소한의 고통과 최소한의 살생으로, 인류를 위한 최대한의 정보를 구한다는 것

 

 

살아있는 것들은 다 각자의 전략이 있다. 

_ 인간이랑 전혀 관계 없는 거 왜 연구해요? 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우리와 전혀 다른 전략을 취하기에 배울 수 있는 것이 또 있을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