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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락사락_책갈피

Norwegian Wood by Haruki Murakami

by 푸른보리 2018. 8. 6.



당신에게 받은 책을 이제야 다시 폈다. 보내주었던 짧은 편지도.







p30-31

과연 이 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종류의 희망과 인생의 목적이 있다고 나는 새삼 감탄했다. 그것이 내가 도쿄에 와서 처음으로 감탄한 일 가운데 하나였다. 하긴 지도제작에 관심과 열정을 품은 사람이 조금이라도 없으면(너무 많을 필요까지는 없겠지만.) 곤란할 것도 같다.그러나 '지도'라는 말을 할 때마다 말을 더듬어 버리는 인간이 국토 지리원에 들어가고 싶어한다는 사실은 참으로 기묘했다. 그는 때에 따라 더듬기도 하고 더듬지 않기도 했지만 '지도'라는 말만 나오면 100퍼센트 말을 더듬었다.

"너, 너는 전공이 뭐야?" 그가 내게 물었다.

"연극." 나는 대답했다.

"연극이라면, 연기를 해?"

"아니, 그런 게 아니고 말이야, 희곡을 읽기도 하면서 연구하는 거야. 라신이라든지 이오네스코, 또는 셰익스피어 같은 거."


셰익스피어 말고는 처음듣는 이름이라고 그는 말했다. 나도 거의 처음 듣는 이름이다. 강의 소개에 그런 이름이 들어 있어서 그냥 읊었을 뿐이다.

"어쨋거나 그런 걸 좋아한다는 거네?" 그가 말했다.

"별로 좋아하는 건 아냐." 그 대답은 그를 혼란스럽게 했다. 혼란에 빠지면 말을 더 심하게 더듬는다. ㅏ나는 무척 심한 말을 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뭐든 좋았던 거야, 내 경우는." 나는 설명했다. "민속학이나 동양사라도 좋았어. 그렇지맍 어쩌다 보니 연극이 되고 말았어, 마음이 끌렸는지. 그뿐이야." 물론 그런 설명이 그를 납득시킬 수는 없었다.

"잘 이해가 안 가네." 그는 정말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 내 경우는 지, 지, 지도가 좋으니까, 지, 지, 지, 지도 공부를 하는 거야. 그래서 일부러 도, 도쿄에 있는 대학까지 와서 집에서도, 돈을 부쳐 받는 거야. 그런데 넌 그게 아니라니까 ......." 

그의 말이 옳았다. 나는 설명을 포기했다. 그리고 우리는 성냥개비로 제비를 뽑아 2층 침대 아래위를 정했다. 그가 위, 내가 아래였다.


p137

"그게 아냐. 아무리 나라도 그 정도를 바라진 않아. 내가 바라는 건 그냥 투정을 마음껏 부리는 거야. 완벽한 투정. 이를테면 지금 내가 너한테 딸기 쇼트케이크를 먹고 싶다고 해, 그러면 넌 모든 걸 내팽개치고 사러 달려가는 거야. 그리고 헉헉 숨을 헐떡이며 돌아와 '자, 미도리, 딸기 쇼트케이크.' 하고 내밀어. 그러면 내가 '흥, 이제 이딴 건 먹고 싶지도 않아.' 라며 그것을 창밖으로 집어 던져 버려. 내가 바라는 건 바로 그런 거야."

"그건 사랑하고는 아무 관계도 없는 것 같은데." 난 좀 어이가 없었다.

"있다니까. 네가 잘 모를 뿐이야. 여자한테는 그런 게 무지 무지 소중할 때가 있거든."

"딸기 쇼트케이크를 창밖으로 집어 던지는 게?"

"그렇다니까. 난 남자애가 이렇게 말해 줬으면 좋겠어. '알았어, 미도리. 내가 잘못했어. 네가 딸기 쇼트케이크를 먹기 싫어졌다는 거 미리 알았어야 했는데. 난 정말 당나귀 똥만큼 멍청하고 센스가 없어. 사과하는 의미에서 다른 걸 하나 사다 줄게. 뭐가 좋아? 초콜릿 무스, 아니면 치즈 케이크?'"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데?"

"난, 그만큼 더 상대를 사랑해 주는 거지."

"정말 이해하기 힘든 얘기인 것 같은데." 

"하지만 내게는 그게 사랑이야. 아무도 이해해 주지 않겠지만."

그러고 나서 미도리는 내 어깨 위에서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어떤 사람들한테 사랑이란 그렇게 아주 사소하고 쓸데없는 데서 시작되는 거야. 그런 게 없으면 시작되지가 않아."



p192-193

"[노르웨이의 숲] 부탁해." 나오코가 말했다.

레이코 씨가 부엌에서 고양이 저금통을 들고 오자 나오코가 지갑에서 100엔 동전을 꺼내 거기에 넣었다.

" 뭔데요, 그거?"

"내가 [노르웨이의 숲]을 신청할 때마다 여기에 100엔을 넣기로 되어 있어. 이 곡을 제일 좋아하니까 특별히 이렇게 해. 마음을 담아 신청하는 거지."

"그게 내 담뱃값이 되기도 하고."

레이코 씨는 손가락을 푼 다음 [노르웨이의 숲]을 연주했다. 그녀의 연주에는 마음이 담겼고 그러면서도 지나치게 감정에 빠져들지 않았다. 나도 호주머니에서 100엔을 꺼내 저금통에 넣었다.

"고마워." 레이코 씨는 그렇게 말하며 방긋 웃었다.

"이 노래를 들으면 때로 나는 정말 슬퍼져.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마치 깊은 숲 속을 헤매는 듯한 느낌이 들어. 춥고 외롭고, 그리고 캄캄한데 아무도 나를 도와주러 오지 않아. 그래서 내가 원하지 않으면 레이코 씨는 절대로 이 곡을 연주하지 않아." 나오코가 말했다. 

"무슨 [카사블랑카] 같은 이야기잖아." 레이코 씨가 웃었다.

그런 다음 레이코 씨는 보사노바를 몇 곡 연주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나오코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스스로 편지에 썼듯이 이전보다 건강해 보였고 햇볕에 그을린 피부에다 몸매는 운동과 야외 작업 덕분에 많이 탄탄해진 것 같았다. 호수처럼 깊고 맑은 눈동자와 부끄러운 듯 흔들리는 작은 입술만은 예전과 다를 바 없었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그녀의 아름다움은 성숙한 여성의 것으로 바뀌었다. 예전 그 아룸다움의 그늘에 보이지 않게 숨어 있던 어떤 날카로움(때로 가슴을 서늘하게 하는 예리한 면도날 같은)은 저 멀리 물러나고 그 대신에 상냥하게 어루만지는 듯한 특한 고요가 감돌았다. 그 아름다움이 내 가슴을 뒤흔들었다. 그리고 고작 반년 사이에 한 여성이 이만큼이나 크게 바뀌어 버릴 수 있다는 사실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새로이 나오코의 몸을 감싸고 도는 그 아름다움은 예전과 같은 정도로 또는 그 이상으로 나를 끌어당겼지만, 그래도 그녀가 잃어버린 것을 생각하니 조금 안타깝기도 했다. 사춘기 소녀 특유의 거침없이 홀로 앞으로 나아갈 것 같은 아름다움은 다시 그녀에게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p201

"자주 그래. 감정이 차올라서 울어. 괜찮아, 그건 그것대로. 감정을 바깥으로 표출하는 거니까. 무서운 건 그걸 바깥으로 드러내지 못할 때야. 감정이 안에서 쌓여 점점 딱딱하게 굳어버리는 거지. 여러 가지 감정이 뭉쳐서 몸 안에서 죽어 가는 거. 그러면 큰일이야."

"아까 내가 말을 잘못 한 건 아닌가요?"

"아무것도. 괜찮아, 아무 잘못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뭐든 솔직하게 말하도록 해. 그게 제일 좋은 거야. 만일 그 때문에 서로 얼마간 상처를 준다 해도, 아니면 아까처럼 누군가의 감정을 격앙시킨다 해도 긴 안목으로 봐서 그게 제일 좋아. 자기도 진심으로 나오코의 회복을 바란다면 그래야 돼. 처음에도 말했듯이 그 애를 도우려 하지 말고, 그 애를 회복시켜서 자신도 회복하고 싶다고 바라는 거야. 그게 여기 방식이니까. 그러니까 자기 역시 뭐든 솔직히 말해야 해, 여기에서는. 밖에서는 사람들이 아무것도 솔직하게 말하지 않잖아?"


p202

"왜 나오코만 잘 모른다는 거죠?"

"아마도 내가 그 애를 좋아하니까. 그래서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없는 게 아닐까, 감정이 너무 개입돼서. 난 그 애를 좋아해, 정말로. 그리고 그것 말고도 그 애의 경우는 여러 가지 문제가 아주 복잡하게 얽힌 실타래 같아서 그걸 하나하나 풀어가는 게 핵심이 아닐까 싶어. 모두를 풀어내기까지 오랜 기간이 걸릴지도 모르고 또는 어떤 계기로 갑자기 모든 문제가 풀려 버릴지도 몰라. 뭐, 그런 거야. 그래서 나도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거지."


p317

"친척이 문병 와서 여기서 같이 밥을 먹잖아, 그러면 모두 반은 남겨. 너처럼. 그래서 내가 덥썩 다 먹어 치우면 '미도리는 건강해서 좋겠네. 나는 가슴이 먹먹해서 도저히 다 먹을 수가 없어.'라고 해.그렇지만 간병하는 사람은 바로 나야. 농담이 아니야. 남은 그냥 찾아와서 동정할 뿐이야. 화장실 수발도 들고 가래도 받고 몸을 닦아 주는 건 바로 나야. 동정만 해도 대소변이 처리된다면, 그 사람들보다 오십 배는 더 동정할 거야. 그런데도 내가 밥을 다 먹어 치우면 나를 비난 섞인 눈길로 바라보며 '미도리는 건강해서 좋겠네.'라고 해. 나를 무슨 짐수레나 끄는 당나귀 같은 걸로 생각하는 건가? 나이도 먹을 만큼 먹어 가지고서는 왜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모를까, 그 사람들? 입으로는 무슨 말인들 못 하겠어. 중요한 건 대소변을 치우느냐 치우지 않느냐 하는 거거든. 나도 상처받을 때가 있어. 나도 지쳐서 축 늘어질 때가 있어. 나도 울고 싶을 때가 있어. 나을 가능성도 없는 사람을 잡아다 의사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머리를 열고 마음대로 주무르고, 그걸 몇 차례 반복하는 사이에 몸은 점점 더 나빠지고, 정신 상태도 이상해지고, 그런 걸 두 눈으로 오래 지켜보고 있어 봐, 견딜 수 없다고. 게다가 저축한 돈은 점점 줄어들고, 앞으로 삼 년 반 더 대학에 다닐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고, 언니도 이런 상태로는 결혼식도 못할 거고." 


p335

가끔 견디기 힘든 외로움에 젖을 때도 있지만, 난 대체로 건강하게 잘 지내. 네가 매일 아침 새를 돌보고 밭일을 하는 것처럼 나도 매일 아침 나의 태엽을 감아. 침대에서 나와 이를 닦고 수염을 깎고 아침을 먹고 옷을 갈아입고 기숙사 현관을 나와 학교에 도착할 때까지 난 대체로 서른여섯 번 정도 끼륵, 끼륵 태엽을 감아. 자 오늘도 하루를 잘 살아 보자고 하면서.


p486

나는 미도리에게 전화를 걸어, 너와 꼭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할 이야기가 너무 많아. 꼭 해야 할 말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 이 세상에서 너 말고 내가 바라는 건 아무것도 없어. 너를 만나 이야기하고 싶어. 모든 것을 너와 둘이서 처음부터 시작하고 싶어, 하고 말했다.

...

나는 지금 어디에 있지?

나는 수화기를 든 채 고개를 들고 공중전화 부스 주변을 휙 둘러보았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지? 그러나 거기가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도대체 여기는 어디지? 내 눈에 비치는 것은 어디인지 모를 곳을 향해 그저 걸어가는 무수한 사람들의 모습뿐이었다. 나는 어느 곳도 아닌 장소의 한가운데에서 애타게 미도리를 불렀다.


2018년 8월 31일, 드디어 끝 장.